욥기 제11과

욥기 42:1-17

나의  

하나님께서는 1장에서 사탄과 이야기하실 때, 욥을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을 향한 하나님의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장 (42장)에서 주님은 사랑을 담아 “내 종 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기꺼이 순종한다는 것을 아실 때 비로소 그들을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공부를끝마칠 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시면서,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욥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모든 종들에 대해서, 그의 아들, 고난 받는 종에게 하신 것과 같은 말씀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이사야 42:1)

믿음의 사람

욥기 성경공부를 마치면서, 우리는 욥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을향한 신뢰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존 브라이트 (John Bright)는 그의 고전적인 책 “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크리스천다이제스트 역간)에서 그 의미를 잘 설명했습니다. “믿음은어떤 의문도 없었기 때문에 질문들로 인해 흐트러지지 않는 의기양양한 신념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의문을 가지고 질문했던 모든 것에 대한 아주 적은 답을 얻었음에도, 이 명령들을 확실히 듣는 것입니다. 허리를 동이라! 의무를 다 하라!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라! (p. 119-120) 이것이 욥이 행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졌습니다. 

가장  질문

그렇지만 그에게 큰 질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에 걸쳐 내려온 질문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는 고난 받고 있습니까? 왜 의인들이 고난 받아야 합니까? 어쩌면 우리도 같은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아버지께 부르짖으실 때, “왜”라는 질문의 신뢰와 존엄성을 주셨습니다. (시편 22:1) 하나님께서 욥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욥이 기대했던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답이 되셨습니다. 욥이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전 존재는 그 깊음 속에 요동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처럼 임했습니다. 욥의 반응은 그의 얼굴을 땅에 엎드려 회개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의 죄만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어둠을정복하시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향한 인자한 돌보심과 우주를 주관하시고 붙드시는 그분의 지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이 고요함 속에서,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말씀하십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뿐 아니라 폭풍우의한복판에서의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때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 특별히 고난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무조건적이며, 변화를 가져다주는 사랑은 욥기를 마무리하는 위엄, 자비, 사명, 그리고 신비의 네 단어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 네 단어를 소개해 주신 친애하는 친구이자 고든 콘웰 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전 세계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게리 패럿 박사 (Dr. Gary Parrett) 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네 단어는 그가 몇 년 전 바이올라 대학교에서 이사야 6:1-13절과 로마서 12:1-2절을 본문으로 전했던 설교의 제목이었습니다. 그의 친절한 허락 하에 여기에서 그 단어들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YouTube를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는 욥에 대해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이 네단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위엄

욥은 자신의 큰 고난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의롭고 무고한 사람들이 고난 받는것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의 지적인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물을 수 있는 가장 큰질문에 대한 철학적인 대답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신에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모든 위엄과 영광 가운데 서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의 권능 말씀으로 만유를 함께 붙드시며,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의운명을 다스리시면서,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도록 호흡을 주시는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자신의 거룩하심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욥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반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회개였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5-6)

하나님을 대면했던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작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위엄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 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나타나셨고, 그에게 이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대담하고 교만한 태도로 향을 피우기 위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 일로 인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사장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고, 결국웃시야는 나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해에, 이사야는 주님을 만났고, 보좌 앞에 앉아 주님을 높이 올려 드렸습니다. 그의 즉각적인 반응은 얼굴을 땅에 대고 회개하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9)

하시드 파의 훌륭한 교사인 랍비 부남 (Rabbi Bunam)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돌을주머니에 가지고 다녀야 한다. 하나는 ‘나는 재와 먼지일 뿐이다’라는 돌이다. 다른 돌은 ‘나를 위해 세상이창조되었다.’라는 돌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두 개의 돌 모두를 사용해야 한다.”

자비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긍휼과 자비를 보이셨고, 예수님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회개한 범죄자를 후에 맞아 주셨던 것처럼, 주님의 임재 안에서 욥을맞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문은 그 사람에게 즉시 열렸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3) 회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돌보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용서하셨고 그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선지자 미가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 (미가 7:18-19)

욥의 죄는 그가 하나님에 대해 했던 말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내 종 욥이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옳으니라.”(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의 죄는 그가 자신에 대해 했던 말에서 분명히드러났습니다. 교만은 욥의 가장 큰 죄였습니다. 욥은 세 친구들 안에 있는 교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헨리 페얼리 (Henry Fairlie), The Seven Deadly Sins Today, p. 17) 욥은 자기 존중과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처럼 좋은 성품이 얼마나 쉽게 교만으로 바뀔 수 있는지 깨닫는 데 실패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을 “고결한 사람들의 죄”라고 부릅니다. 욥은 그들과 공유하지 않은 그의 친구들의 영적인 질병을 볼 수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질병 너머에는 그가 공유했던 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욥이 회개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시편 104편은 욥이 회개한 후의 삶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놀랍게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에게 일어났던 일 (38-41장에 기록된 일)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 그의 유일한 반응은 예배입니다. 다른 시편인 시편 95편은 예배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예배는 찬양으로 시작해서 외침, 기쁨으로 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시편95:1-5) 그러나 찬양은 예배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95:6) 이사야가 주님을 보았을 때,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회개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예배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을 향한예배입니다. 이사야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 6:3) 

진정한 회개의 표지는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회개와 기쁨은 반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쁨의 눈물로회개하곤 합니다. 욥은 자신이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죄인들 중에 가장큰 자라고 부르는 동시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다는 사실 (욥기 42:12) 외에 그의 미래의 삶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이 예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한 시편 기자의 말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아니하리로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8, 11) 이 말씀은 주님의 진실된 종들의 고백입니다. 

사명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고, 하나님의나라 안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기 위해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마지막 장에서읽을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지상대명령이 사실은 사복음서 모두에 주어졌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실, 하나님의 지상대명령은 성경의 모든 책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서의 지상대명령에 대한 설명은 각각 다른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지상대명령은 요한복음 20:19-2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했던 첫 번째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지상대명령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지은 모든 사람들을 우리 자신이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화해를 가져오며, 우리에게 대한 그들의 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화해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사명은 그에게 죄를 지었던 그의 형제들을 용서하고, 하나님 또한 그들을 용서하실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욥이 주님의 진실된 종으로서 했던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를 저주했던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을 (욥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더라.” (42:9)

신비

우리에게는 신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논리로 풀어내야만 하는 수수께끼가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로 초청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의 신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4-15)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선택한 방식 또한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분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아기이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전에 예비된 부모 아래서 자라난 자녀로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주 앞에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이”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자라나실 때, 그분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이사야 53:2-3a)

신비는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0장에서 66장에 묘사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가운데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는 종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고난, 사실상 모든 인류의 모든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승리가 고난을 통해 임하게 된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을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가 옛 언약을 넘어서 새 언약까지 거의 이르렀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죄, 질병, 그리고 고난을 자신이 지심으로써 그 모든 것을 이기셨고, 마귀의 일을 멸하십니다. (요한일서 3:8) 그분은 연약함 가운데 십자가에못박히셨지만.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십니다.” (히브리서 2:10)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완전한 제물이 되셨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승리를 이루어내셨습니다. 

참으로 경건의 신비는 위대합니다. “그는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음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디모데전서 3:16) 우리는 이러한 경건의 신비에 동참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 당하시고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을 익히 아시는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이신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이사야 52:13-53:12)

욥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모든 소유가 갑절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열 명의 자녀를더 주셨고, 욥의 말년에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더 살기 좋은 나라를 찾아 가지만 바다에서또는 국경 경비대의 손에 죽고 마는 수백만의 난민들의 삶이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정치범들, 그리고 고통스러운 병상에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고난은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신비는 욥의 회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구원의 선물, 영원한 생명의선물을 받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욥이 알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분은 우리의 고난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고난 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난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68:15) 그분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 받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에 대해 날마다 죽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거하는 우리는 또한 고난 받는 종 안에 거합니다. 우리 또한 죽어가는 세상을 건져내기 위해 “고난 받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신 뒤에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생각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상상력을 사용해 보셨습니까? 욥기는 그것을 상상하도록 우리를 초청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이 자신을 정죄했던 세 친구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풀어주고위로를 가지고 가지 않고는 그렇게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욥을 위한 더 큰 계획, 단순히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상의 더 큰 사명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고난 받은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배운 것 외에 욥의 삶에 대해 아는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을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사용하기 원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아마도 이것이 욥기를 우리가 지금 공부하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축복할 수 있도록 고난을 통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1:29)

우리는 욥기 성경공부를 준비할 때 고난 속에 숨겨진 보배를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기독교 마리아 자매회의 설립자인 마더 바실레아 슐링크 (Mother Basilea Schlink)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배는 십자가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보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욥은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가 전진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 가운데 거기에 동참합니다. (빌립보서 3:10-11) 우리는 그분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하늘의 거대한 증인들의 무리에 함께 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슬픔, 위험, 또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중보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또 다른 때에 우리는 모든 이교도들과 지도자들이 도시를 떠나는 동안, 카르타고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A.D. 250년 카르타고에 들어온 “파라볼라니 (parabolani)” (모험가 또는 도박꾼의 그리스 이름)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됨으로써 예수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카르타고로 들어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고난 받는 사람들을 섬기다가 죽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거룩한 불의 공동체”라고 이름 붙인 사람들, 즉 요구되는 모든 것을 행하며 모든 것을 불태우는 무리 가운데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Covid-19과의 싸움터에 기꺼이 들어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시키는 불의와 불평등의 장벽을 제거하며, 고난 받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선택한 것이 신비입니다. 수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은 오늘도 열방 가운데서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의보배를 계속해서 전파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고난을 받고 있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열방의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1b-2)

생각해 볼 것들

이제 욥기를 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들을 할 시간입니다. 

1. 욥이 고난에 대해 배운 것은 무엇이며, 그 결과로 그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2. 욥기를 공부하면서 고난 속에서 보배를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준 귀중한 보석들을 발견하셨습니까?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서 어떤 보석들을 발견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고난을 통해 욥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 것
  • 고난을 통해 확장된 욥의 삶
  • 욥이 그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진 것
  • 욥이 모욕을 통해 얻게 된 새로운 겸손
  • 욥에게 다른 사람들, 심지어 자신을 판단한 사람들까지 위로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신 하나님의긍휼을 새롭게 발견한 것
  • 세상에 대한 욥의 새로운 세계관, 약함을 통해 임하는 권능,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자신의 일을 내려놓는 것
  • 숨겨지는 것의 권능에 대한 새로운 이해, 특별히 사탄이 그를 멸할 수 없도록 그를 숨겨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인해 그가 “은혜 안에 서 있게 된 것”에 대한 발견
  • 욥을 시험하는 중에도 그와 함께 사망의 그늘의 골짜기를 걷고 계셨던 하나님에 대한 욥의 새로운이해, 
  • 자신의 고난을 축복 아래에 놓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된 것
  • 그의 세 친구로부터 시작해서 그 너머까지 확장되는 새로운 공동체 – 코이노니아의 발견

욥기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시험 가운데 있는 욥에게 어떻게 사역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기를 구해보십시오. 그리고 욥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더 큰 섬김을 위해 그를 어떻게 준비시켰는지 찾아보십시오. 

3. 욥이 아들에게만 아버지의 유산을 받게 했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린 것에 주목하십시오. 욥은 그의 딸들에게 아들들과 같이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욥기 42:15)

4. 당신의 삶 가운데서 당신이 “바닥을 칠 때” 하나님께서 거기 계심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까? 코리텐 붐 (Corrie ten Boom)의 언니인 벳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형 당하기 전에 마지막 했던 말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구덩이가 깊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미전도 종족인아우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기 위해 나아갔다가, 그들에 의해 다른 네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 당했던, 엘리자베스 엘리어트 (Elisabeth Eliot)의 말 또한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가장 가혹한 시험은우리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허망한 것임을 증명하는 뜻밖의 증거를 보게  때입니다만일 하나님이 하나님이셨다면만일 그분이 전능하셨다면만일 그분이 돌보셨다면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지금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일이 …  순종의 보상일까내가 환경에 의해 불신앙으로 다시돌아가 심연 속을 들여다봅니다그렇지만  깊은 심연에는 어두움만이 있을 뿐이고희미한 빛도응답하는 메아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습니다그것은 우리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탄식 슬픔 손을  비게 하고  마음을 깨뜨리는 이처럼 완전한 상실감만일 내가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있고그렇게 된다면 나는  손에서 무언가 드릴  있는 것을 찾게  것입니다그래서 나는 그것을 신비스러운 교환으로 자신을 나에게 주신 그분께 돌려드립니다.” 

5. 이 성경공부를 통해 주변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나 세상의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얻었습니까? 이제 빌립보서 1:29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때로 세상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들이 고난을 선택하도록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6.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까?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에 대한 공부를 끝마쳤습니다. 이제 적어도 한 사람에게 욥기를 가르칠 준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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