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5:1—18:21
욥과 친구들의 두 번째 변론 (Part A)
두 번째 변론 (A)
욥의 세 친구들의 태도는 두 번째 변론에서 극적으로 변합니다. 그들은 긍휼의 마음을 잃어버렸고 욥에대해 전혀 자비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친구 욥의 고난을 위로하기 위한 사랑으로 그토록 먼길을 왔던 친구들이 얼마나 빨리 인내심을 잃고 위로자가 아닌 고발자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그들을 악한 사람들로 만들지도 않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말하는 욥 또한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우정에 있어서 이처럼 명백한 가로막힘은 우정에 대해 무엇을 드러냅니까? 확실한 것은, 우정에 있어서 자비와 긍휼이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듣는 것 또한 우정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학은깔끔하고 간결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인간적인 지식을 넘어서 나아가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그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욥의 이해를 넓혀 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가르치는 방법을 소화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이해의 렌즈로만 욥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친구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어떻게 서로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 친구는 서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언가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욥에게만 아니라 그들 자신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줄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욥과 친구들은 서로를 향한 커다란 분노로 대화를 맺게 되었습니다.
- 이것은 우정의 또 다른 특징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충돌할 때에도 서로를 빨리 용서해야합니다. 우정에 있어서 판단주의 (judgmentalism)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국에 그들의 우정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그들에게 서로 용서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고난에 대해 인간적인 논리로 줄 수 있는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노한 욥이나 친구들 모두 그 진리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 그들 안에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 번째와 세 번째 변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두 번째 변론을 시작합니다. 15:1-35
엘리바스에 관해 주목할 것들
- 그가 욥에게 처음 말할 때 보여주었던 인내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욥의 지혜를 인정하지만 하나님에대한 지식과 그가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 그는 지금이 하나님께 도전하고, 친구들의 지혜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욥을 꾸짖을 때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않으시고 천국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한데 (의문스러운가정),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그 신뢰가 얼마나 덜 하겠냐고 알려줍니다.
- 그는 구약의 모든 의로운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었던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로욥을 판단합니다. (엘리바스는 생각을 바뀐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4:6절에서 욥에게 “네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 그는 심지어 욥이 하나님을 묵상을 방해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 엘리바스는 욥을 뇌물을 받는 위선자로 부릅니다! (15:34)
- 그리고 나서 그는 일반적인 악인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거의 설교와 같았고, 심지어욥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욥의 원망을 무시하고, 단순히 욥을 악한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 마침내 그는 자신이 욥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이 자신의 입으로 그를 정죄한 것이라는 것을유지함으로써 자기의 (self-righteousness)를 드러냅니다.
- 엘리바스는 확실히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들중에 가장 의로운 자로 말씀하신 친구의 고난에 대해 긍휼의 마음이 없는 냉정한 정통이었습니다.
욥은 이제 그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신학 체계에 도전합니다. 친구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욥을도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합니다.
욥의 대답. 16:1-17:16
- 욥은 지금 완전히 혼자라고 느낍니다. 친구들은 그를 아주 죄악 되고 악한 사람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말합니다.
- 그는 친구들에게 상황이 역전되면 자신이 어떻게 말할지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16:5)
- 그러나 그의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피로하게 하셨고” (16:7)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다는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고” (16:8),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다고 말합니다.
- 그렇지만 고통 속에서 욥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 (16:19) 이 증인이 누구입니까? 욥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러한 중보자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 욥의 소망은 나중에 그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당시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증인과 하늘의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은 욥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감당해야 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 욥에게 이처럼 놀라운 소망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의 그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힌트를 주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자 마자 바로 욥은 고통과 고난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 다시 한번 그의 영은 깨어졌고, 더 이상 계속해서 살아갈 목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빌닷의 변론 (18:1-21)
빌닷은 세 친구들 중에서 가장 피상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지금 모든 자비와긍휼을 잃어버렸고, 욥에게서 어떤 소망도 보지 못합니다. 그는 욥에게 아주 안하무인으로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고 이야기합니다. (18:2) 그는 욥이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빌닷이엇습니다.
빌닷은 모두가 알아야 할 신학적 교리는 절대로 도전받아서는 안 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합니다. 그의교리는 은혜가 아니라 율법에 기초한 것이었고, 심지어 그의 태도조차도 고난 받는 형제에게 위로하고 섬기는 것보다 정통 교리를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는 욥이 광명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처소인 흑암으로 쫓겨갔다고 결론짓습니다. 빌닷은두 번째 변론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메시지는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망연자실해 있습니다. 빌닷은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18:21)고 말합니다.
생각해 볼 내용들
1. 어떻게 하면 욥과 세 친구들이 더 나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접근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했습니까?
2.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의 대답에서 소망의 어떤 요소들을 발견하셨습니까?
3. 욥에 대한 빌닷의 불만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